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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

빛의 과거-은희경-책리뷰

by 꿈꾸는 호수 202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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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란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벽돌로 다른 새로운 집을 짓는 일이라는 말은 작품내에서 외국작가의 말로서 인용되고 있지만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문장일지 모른다. 그것은 최근에 소설읽기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나에게 던져진 하나의 통찰같은 것이었다. 40대에 들어선 나이가 직접경험으로서는 그리 대단치 않을 수 있지만 그 동안 맺어지고 헤어진 인간관계와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간접경험들만으로도 다른 삶에 대한 궁금증뿐 아니라 나의 삶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동질감이나 우월감, 애석함, 동정 등 많은 감정들을 이미 겪어본 것 같다는 거만함을 준 탓일 게다.

 

 90년대 등단하여 소설의 주인공으로 여성을 두고 여성으로서의 시각과 여성의 삶을 부각시켰던 은희경 작가의 주제의식은 당대에 센세이셔널했지만 현재에 와서는 수없이 반복되는 잔소리와 같다. 하지만 잔소리란 것이 으레 그렇듯 여전히 고쳐지지 않기에 멈추지 않는 것이다. 매끄러우면서 섬세하고 적절한 수사가 포함된 문체 역시 돋보였다. 다만 나로서는 20대 여대생의 사랑이야기가 작품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로 취급된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을 뿐이었다. 

 

거창한 서사나 화려한 사건 전개 없이 여학생 그리고 중년여성의 삶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예민한 이야기들만으로도 한편의 장편소설이 완성된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육아와 가사노동, 그리고 약간의 취미생활만으로도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채워진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소확행을 추구하는 20-30대의 가벼움이랄까. 은희경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이런 식의 비판에 익숙한 그가 답하기를 흔히 생각하듯이 가벼움은 처음부터 가벼운 세대인 신세대의 주장이 아니라 무거움 때문에 고통받았던 사람의 자기부정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라며 가볍게 받아쳤다. 

 

소확행이라는 것도 사실은 철없는 젊은 인생들의 가벼움이라기보다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비롯된 자기 위안이므로 어쩌면 1959년생의 은희경은 1990년대 생의 삶과 맞닿아있는지도 모른다. 자기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없는 절망의 세대가 세상을 바꾸든 자신의 위치를 바꾸든 , 변화를 위해 치열하게 부딪히는 삶보다는 가볍게 소확행의 삶을 선택하듯이 격동의 근현대사를 건너온 은희경 작가가 연애와 불륜을 주요한 소재로 거창하지 않은 소소한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때문에 1977년과 2017년을 책 속의 책으로 엮어내며 하나의 렌즈 안에 담아낸 구성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잘 써낸 글과 문장을 읽는 것은 깨끗하게 정돈된 안방을 보는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또한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 보게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구슬 꿰듯이 과거와 현재의 조각을 맞추어가는 재미 또한 가볍지 않다. 그래도 내가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두 공주가 용감무쌍하게 여행을 떠나 겪는 사건 사고였다. 여대생들의 미묘한 감정싸움과 애증의 관계로 이어지는 골드미스들의 신경전보다는 누구나 한 개쯤은 갖고 있을 젊은 시절 여행의 추억을 소환해준 그 이야기가 나에겐 소확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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