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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

알베르 까뮈의 책 "페스트", 그리고 인종차별을 경험한 날

by 꿈꾸는 호수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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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골프장에서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마샬이 와서 버기 놓는 위치에 대해 한 마디 하고 갔는데 두고두고 기분이 나쁜 것이다.

 

어찌 보면 할 만한 얘기, 당연한 얘기를 하고 간 것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버힐골프장을 다니면서 일 년에 한 번 꼴로 비슷한 기분 나쁜 일을 겪는데, 어제 일은 나에겐 일종의 계기가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우리 쪽에서 뭔가 책 잡힐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에 그 사람에게 항의하거나, 대놓고 욕할 수조차 없는 찝찝함이 더욱 불쾌했는데 우리 쪽에서 잘못한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니, 이제는 내가 받은 모욕(지금 생각해보니 모욕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벨 초보이면서 코로나 초기에, 나를 포함 한국 여자 셋이 플레이할 때 뒤에서 따라오시던 어떤 한국 여자분이 다가오셔서 몇 마디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났다.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아시안들을 좋게 보지 않는데, 매너 가지고 책잡힐 행동을 하면 안 되지 않겠냐"면서,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알려주고 가셨는데, 모르는 부분을 알려주셔서 고맙고, 친절하게 말씀하신 것도 맞지만, 무언가 마음속에는 억울함이 있었다.

 

그분의 그때 그 말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을지 깊이 공감이 갔다. '오래 계셨으니,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셨겠구나.' 싶었다. 동시에 어느 새인가 나도 그분처럼 주변 한국인들에게 매너를 강조하면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아닌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건 우리인데 왜 우리가 더 고개를 숙이고 더 눈치를 봐야 하지?

영국인들의 겉으로 예의 바른 척하면서 돌려 까는 수법에 그동안 너무 당하고 살았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밀려왔다. '무언가 마음속에 있는 억울함'은 바로 이 부분이었던 것이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우리는 아시안이기 때문에 더욱 비난을 받고,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억울함!

 

 

책, 페스트에서 말하듯이 실존을 위협하는 재앙, 그것이 전쟁이든, 질병이든, 혐오와 차별이든, 사회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일 지라도, 인간은 그 재앙 앞에 참으로 나약하다.

 

당장 내가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면 정의와 평등, 인류애 같은 보편적 가치는 쉽게 내던져지고 차별과 구분 짓기를 통해 내가 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고 나와는 다른 저 사람이 먼저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비롯되었고, 초기에 숨기기 급급한 대응으로 결국 팬더믹을 불러왔다는 원망에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일었고, 이는 금세 아시안 전체에 대한 혐오로 확장되었다. 아시안들 사이에서는 "I am Chinese"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며 "나는 중국인 아니야, 나도 중국인 싫어해"라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것 역시 또 다른 구별 짓기, 차별과 혐오다.

 

스페인 독감으로 2년에 걸친 팬더믹이 있었고 코로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스페인 혐오가 일어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스페인 독감이 스페인에서 발생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자).

 

애초에 실존적인 재앙에 맞닥뜨린 인간들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화풀이를 하는 대상은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코로나 상황에서 자산 가격 폭등으로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계층의 사람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많은 사람들은 중산층 삶의 기반을 잃고 최하층으로 떨어졌다.

 

재앙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가장 차별받고 혐오받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며 스스로 자멸하거나 이 집 저 집 불을 지르며 공멸하는 것이다.

 

벌써 70년 전에 쓰였던 페스트라는 책은 지금의 코로나 팬더믹과 꼭 닮아 있어, 지금 내가 쓰는 내용이 페스트에 대한 감상인지, 현재 상황에 대한 느낌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까뮈는 이러한 인간 실존을 위협하는 재앙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인간들 사이의 연대를 제시한다.

 

오랑시의 중요한 의사인 리 외도 있지만, 오히려 타지 사람인 타로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페스트를 쓴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고, 흑인이나 아시안이었다면, 페스트의 원인으로 유색인종의 무언가가 지목되고 차별받고 고통받는 내용이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과연 그렇게 그들의 가장 창피하고 취약한 부분을 찔렀다면 이 책이 백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을까?

 

코로나 팬더믹 상황에서 우리 가정은 사실상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는 입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은 팬더믹이 가져온 인종차별과 혐오라는 또 다른 재앙의 직접적인 피해를 안겨주었다.

 

나에게 충고를 해주셨던 한국 골퍼분이나 나 자신 또한 같은 한국인에게 '너는 나보다 초보니까, 너는 잘 모르니까'라는 잣대를 들어 차별하고 구분 지으려 하지 않았나 반성했다.

 

팬더믹 상황이 아니라도 외국에 10년쯤 넘게 살아보신 분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에게는 한국이 최고라는 말들을 한다. 뛰어난 의료시설이나 생활의 편리함 때문도 있지만, 이러한 인종차별이 한 번씩 주는 실존적 괴로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해외생활 10년 차에 접어드는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주재 선배들이 사소한 시비나 별 거 아닌 것 같은 얘기에도 "그거 인종차별이야" 하면서 발끈하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굳이 저렇게 예민하게 굴면 본인이 피곤하지 않을까?'하고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보니 굳이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 하고 넘어갔던 것이 차별주의자로 하여금 마음껏 차별하게끔 내버려 둔 셈이 되었던 듯싶다. 그들의 그런 예민함과 항의가 있었기에 10년 전보다는 현재가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었음을 알 것 같다.

 

남편에게 이럴 때 참고 싶지 않으면 뭐라고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다.

 

"충고해 줘서 고맙지만, 왜 나한테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라고 되물어 보라는 답을 받았다.

 

내가 굉장히 어렸을 때 엄마가 운전을 하셨는데,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진짜 아무 이유 없이 막말하는 다른 운전자들을 만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다른 차량과 슬쩍 부딪힐 뻔한 적이 있었는데, 상대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엄마가 먼저 험한 말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상대방이 "에이~참" 이러면서 가버렸다. 엄마는 여자가 운전한다고 무시해서 그런다며 절대 안 당할 거라며 흥분을 하셨는데 그때는 그렇게 흥분하는 엄마가 약간 창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옆에 있어서 더 그러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엄마가 그렇게 먼저 치고 나가지 않았다면 그쪽에서 더 심한 말을 퍼붓고 같이 있는 나도 그 말을 들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나에게 있어서 실존적 위협을 주는 인종차별에 대한 대안은 좀 더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고 싶다. 더 조심하고 참거나 아닐 거야 하고 모른 척하는 것보다는 당장 기분이 더럽더라도 인정하고 싸워야겠다. 차별을 당하는 피해자들 사이의 연대는 그 차별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지 않고 차별을 가하는 가해자에게서 찾을 때 가능하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내가 백인 남성이었어도 와서 똑같이 얘기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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